시작은 사소한 행동으로부터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가 맺히고,
습관의 씨앗을 뿌리면 성격의 열매가 맺히고,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맺힌다.
-나폴레옹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전철에 타서인지 덜 혼잡했다. 여기저기 무가지를 읽는 사람, PMP를 통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 DMB 핸드폰을 사용해서 TV를 시청하는 사람. 다양한 아침 출근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김과장이 지난해 진행했던 DMB 핸드폰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전철에서 볼 때마다 묘한 느낌이 든다. 실제 개발을 한 건 아니지만 자사의 제품이 그리고 자신이 전략을 세우고 마케팅 해서 시장에 출시 된 제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어깨가 우쭐하기도 하다. 게임기나 동영상 플레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 더 노력했으면 고객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자극이 되기도 한다.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마케팅 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무가지를 읽다보니 내릴 역이 다음 정거장이 되어 있다.
‘오늘도 신문을 읽다 보니 어느새 회사네. 시간 때우기에는 이게 최고야. 오늘은 시간 내서 본부장 한 번 찾아가 봐야겠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지는 않겠지. 설마 차 한잔 하는 것 가지고 줄서기네 정치합네 그러지는 않겠지.’
평소에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약간은 걱정되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예정된 미팅이 취소되어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실장이 다른 일이 생겼다며 일방적으로 미팅을 취소해버렸다. 김과장은 이 참에 본부장을 찾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과장은 본부장실이 있는 15층으로 향한다.
“본부장님 계신가요?”
“예, 지금 자리에 계십니다. 혹시 약속하고 오셨나요?”
“아니요. 전략 마케팅 1실 김성열 과장이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지 여쭤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인터폰을 통해 본부장과 통화한 비서는 곧 시간이 괜찮다면 들어가도 좋다고 전해준다.
김과장은 본부장실에 들어가자 마자 놀랐다. 큰 책장에 비치되어 있는 다양한 책들과 구석에 쌓여 있는 책들의 양이 엄청나다. 다양한 색과 크기의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그 양이 생각 이상이었기에 조금은 압도된 느낌이다.
“들어왔으면 자리에 앉지 그래. 책이 쌓여있어서 조금 놀란 모양이구먼.”
“예, 사무실에 책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해봤거든요. 대단한 독서가 이신가 봐요.”
“허허. 독서가라….. 책 읽는 게 습관이 되어서 이제는 독서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네. 그나저나 놀라게 해서 미안한걸. 사실 집에 놓아둘 데가 없어서 사무실에 놓다 보니 사무실도 이렇게 바뀌더군.”
“그러면 댁에는 책이 더 많겠네요? 정말 엄청난 독서광이신가 봐요.”
“그런가, 나는 이게 생활이라서 독서광이니 독서가 취미니 이런 말은 별로 안 쓰네. 시간 날 때 마다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이 쌓여 있더군. 사실 가끔은 쌓인 책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할 때도 있다네. 회사에서 잘리면 이게 다 짐 아닌가, 짐. 하하. 자리에 앉게나. 녹차 괜찮지?
“예, 괜찮습니다.”
“시골에 있는 친구가 보내 준 녹차인데, 그 맛이 일품이라네. 한 잔 마셔보게.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인가? 차 한잔 하자고 해도 바쁘다던 그 김과장이. 허허.”
“제가 그랬나요? 사실 오늘 처음으로 본부장님 사무실에 와봤네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미팅이 취소돼서 시간도 나고 이 참에 본부장님 뵙고 차나 얻어 마시러 왔죠.
“그렇구먼. 부담 가지지 말고 자주 찾아 오게나. 녹차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깐.”
“사무실에 있는 책을 보니 왠지 부끄러워 지네요. 저는 요 몇 년간 독서라는걸 해 본적이 없는데요. 진짜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허허, 독서에 관심이 가는 모양인가 보군. 사실 직장인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무언지 알고 있나? 어디 자네 경우를 얘기해 보게.”
“저야, 뭐. 흠, 시간이 부족해서 겠죠. 회사에서 일하랴, 자주 빼먹긴 하지만 학원도 다니랴, 야근하랴 이러다 보면 시간이 부족하죠.”
“대부분의 대답이 시간이 부족해서 일걸세. 정말 시간이 부족해서 인지 신중히 고민해 본 적은 있나?”
“딱히 신중히 고민해 본 적은 없어요. 책이라는 게 학교 때 빼고는 잡지 책 본 게 전부인걸요.”
“허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 우리나라 독서량이 전세계적으로 아주 낮은 수준이니깐.”
“아 저도 그 기사 예전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전철에서 읽은 내용이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기사가 있었던 거 같네요.”
“신문이라. 정기 구독하는 신문이라도 있나? 아니면 전철 무가지를 얘기하는 건가?”
“무가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무가지가 대단한 발명품 같아 보여요. 신문사는 광고로 돈을 벌어서 좋고, 시민은 아침에 무료로 신문 읽어서 좋구요. 윈-윈 모델이죠. 요즘 워낙 많은 신문사에서 무가지를 발행해서 예전처럼 무가지 쟁탈전을 벌이지 않아도 되구요.”
“허허, 그렇긴 하구먼. 자네도 잘 알고 있구먼. 무가지는 결국 광고로 돈을 벌고 있지. 자네 광고가 몇 면이나 되는지 아는가?”
“크게 신경 안 써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상당히 많았던 거 같네요.”
“아마도 반 정도는 광고겠지. 기사는 최신 기사인가? 내가 알기로는 하루 정도 지난 기사로 알고 있는데. 자체적으로 기사를 생산하는 게 아니고 신문사에서 이미 내보낸 기사를 편집해서 싣고 있다네.”
“예, 그렇긴 하죠. 대부분 인터넷에서 머리기사 정도는 본 것들이죠. 그래도 자세히 읽지 않았던 기사가 많긴 하죠. 최신 기사는 없지만……”
“자네 말마따나 최신 기사는 없지. 뉴스가 항상 새로워야 하는데 말야. 우리 애들이 보는 개그 코너에 나오는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 라는 말이 생각나는군. 자네는 무가지를 무료라서 그렇게 불린다고 생각하나?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 무가지로 생각한다네. 전날 이미 접한 정보를 [복습]해서 어디다 쓸 작정인가? 가치있는 기사였으면 인터넷을 통해서도 충분히 읽어봤으리라 생각되네만.”
김과장은 복습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동안 자신이 때 지난 기사를 읽으면서 정보를 습득한다고 생각했었다. 본부장 말처럼 이미 시간이 지난 기사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정보가 아니었다. 그저 무료한 출근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스스로 정보를 습득한다고 자위하고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본부장님이 독서할 시간이 없다는 내 얘기에 무가지 얘기를 하시는 이유가 있군. 출퇴근 시간을 이용하라는 말씀이구나. 예전에는 별로 고려해 보지도 않았었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댄 게 부끄럽네.’
김과장은 오늘 본부장을 방문한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얘기하고 싶었던 진로 문제는 꺼내지는 못했지만 신선한 자극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유익했다고 생각했다.
“김과장, 미안하게 됐네. 내가 회의가 있어서. 오늘 차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떻겠나?”
“아닙니다. 제가 약속도 없이 찾아 왔으니 방해가 된 게 아닌가 싶네요. 다음에도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그러게나. 나야 언제든지 환영일세. 나중에 다시 마시며 얘기하세나.”
“예,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또 찾아 뵙겠습니다.”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탄 지하철이지만 김과장은 새롭게 느껴졌다. 사람이 많이 붐비지 않는다는 점은 같지만, 군데 군데 독서를 하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게 어리석어 보이기 까지 했다. 독서라는 게 조용한 환경에서 집중해서 정독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본부장과의 티타임 이후에 전철에서 독서하는 사람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소설책을 읽는 여자도 보이고, 경영 서적을 읽는 남자, 자기계발과 관련된 책을 읽는 사람들, 그리고 단어를 외우는 고등학생, 심지어 만화책을 읽는 학생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김과장은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무가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마지막 면까지 전면광고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어디 보자, 전체면이 40면에 전면광고만 18면이라! 허, 거의 반이 전면광고구나. 거기에 기사가 있는 면 상단하단 광고를 치면 70~80%는 광고겠구먼. 광고의 양 자체도 그렇지만, 본부장 얘기처럼 기사들도 다 어제 것들로 가득 차있구나. 다른 무가지도 비슷한 기사가 실려있겠군. 그래 요즘 유행하는 어느 개그 프로처럼 뉴스가 뉴스다워야지, 이거야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하루 지난 소식뿐이구나. 그래서 본부장이 복습이라고 했군. 여태껏 때 지난 정보를 복습하고 있었다니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군. 어제 못 읽어본 기사를 자세히 읽어본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도 아닌 거 같군. 중요한 정보였으면 이미 어제 다 읽었을 테니까. 본부장처럼 책이나 읽어볼까? 서점가서 한 권 구입해야겠어.’
김과장은 문득 전철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 무가지를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무표정이 주는 싸늘함이 느껴진다. 문득 자신도 매일 이런 표정으로 출근했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속에 이는 한기를 참을 수가 없다.
‘아, 로봇도 아니고 매일 이런 싸늘한 표정을 서로 쳐다보면서 출근을 하고 있었구나. 대부분의 사람이 별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냉정한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니……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에 비해서 표정은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활기찬 아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니, 활기와는 거리가 멀구나!’
김과장은 독서를 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의 표정을 살펴봤다. 무표정한 다른 사람과는 달리,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 아니면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는지 몰라도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다. 만화책을 읽는 학생의 얼굴에는 재미난 장면이라도 있는지 가벼운 미소마저 감돌고 있다. 김과장은 출근길에 무슨 새로운 사실이라도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이다.
‘점심시간에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려서 블루오션전략이라도 사 읽어야겠어. 본부장님이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데 요약본만 읽어서는 통과하기 힘들겠는데. 유명한 책이라서 분명히 읽어 보셨을 거야.”
“이봐, 전대리 점심 약속 있나?”
“없는데요, 과장님도 없으신가 보네요. 같이 드실래요?”
“그래 그러지. 나 점심 시간에 서점 좀 가야겠어. 블루오션 전략을 사야겠어. 전대리도 사서 읽어 볼래?”
“아뇨. 저는 그냥 요약본이나 읽을래요. 요즘 회사 일에다가 연애 사업하느라 바쁘거든요.”
“그래, 그럼 점심이나 같이 먹지. 서점은 나 혼자 갔다 오면 되겠네.”
“네, 그러시죠.”
예상과는 다르게 서점이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다. 낮 시간 동안 서점에 들려본 기억이 없는 김과장으로써는 매우 낯선 풍경이다. 회사 근처에 있는 서점 중에 규모가 가장 크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수가 직장인 같아 보인다. 일찍 점심을 마치고 책을 살펴보러 왔을 것이다. 김과장은 아침에 생각했던 ‘블루오션전략’을 구입하기 위해서 경영경제서와 자기계발서가 있는 코너로 향한다. 여기도 역시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외근을 나가기 전에 들렸는지 가방은 든 직장인도 눈에 띈다. 김과장은 점심 때 서점이 이런 풍경이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김과장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서점에서 작은 충격을 받았다.
‘아, 그 동안 내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도 모르겠구나. 열심히 인터넷에서 자료 찾고 업무에 충실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독서하는 직장인이 상당하구나. 이 사람들도 바쁜 직장 생활을 하는 틈틈이 방문한 것일 텐데. 나는 스스로 너무 자만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래도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봐야겠구나.’
파란 색 표지의 ‘블루오션전략’을 손에 잡았다. 상당한 두께에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김과장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작은 문화적 충격이 가져다 준 흥분으로 인해서 무언가 자신에게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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